종이팩 하나가 만드는 살림의 길,
순천 밀크로드(milkroad) 캠페인 1부

양진아 

밀크로드 기획자 / 유익한 컴퍼니 대표


순천 원도심과 신도심 중간에 위치한 조곡동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 친척 할머니가 60년 넘게 살던 오래된 한옥을 리모델링해 공정무역 제품, 사회적기업 제품, 순천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편집샵 ‘유익한 상점’과 유익한 캠페인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유익한 활력소’의 대표 양진아 씨다.


양진아 대표는 종이팩을 재활용하면 나무를 덜 베고도 화장지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밀크로드(milkroad) 캠페인을 이끌어 오고 있다. 밀크로드 캠페인은 가정, 가게 등에서 나온 종이팩을 모아 휴지를 만드는 회사에 보내 종이팩이 재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캠페인이다. 종이팩을 씻고 펼치고 말려서 배출하는 과정이 사람들의 일상에 즐거운 일로 자리 잡게 하고 싶다는 양진아 대표는 어쩌다 종이팩을 살리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까?


출발은 단순했다. 어느 날 “종이팩을 모아서 생협에 가져다주면 휴지로 바꿔준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종이팩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종이팩을 모으는 것과 달리 수거 공간에 가져가는 건 쉽지 않았다. 종이팩을 수거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장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서 생협 영업시간에 맞춰 종이팩을 가져다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행정복지센터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개소 준비 중인 자원순환 관련 기관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기관 담당자를 만난 자리에서 “순천 시민들이 마음 편히 종이팩을 배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기관에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제안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귀찮은 업무를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럼 우리가 하자!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공공에서 하지 않겠다면 차라리 내가 해야겠다 싶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모았다. 유익한 상점을 오픈하기 전 샵인샵 형태로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며 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종이팩을 모아서 휴지를 만드는 회사에 보내는 일에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카페며 식당을 운영하는 멤버 네 명이서 종이팩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멤버의 가게에서 종이팩 100장을 받아와 직접 헹구고 펼치고 말렸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여의치않아 방법을 바꿨다. 종이팩을 배출하는 가게에서 직접 종이팩을 헹구고, 펼치고, 말려서 가져다주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종이팩을 가져오면 수량에 관계없이 수거 거점공간인 유익한상점 SNS에 정확하게 기록했고 2020년 6월, 별도의 밀크로드 계정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SNS을 통한 기록 및 참여자 인증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종이팩은 부림제지에 보냈다. 종이팩을 휴지로 바꾸는 제지 회사를 찾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한살림에서 발행한 <살림 이야기>에서 ‘부림제지’를 알게 됐다. 종이팩을 휴지로 바꾸고 싶은데 개인도 보낼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처음엔 “개인은 받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왔다. “양이 좀 될 것 같다”라고 하니 감사하게도 착불 발송을 제안해주셨다. 그러다 발송 빈도가 잦아지면서는 부림제지 측의 배송료 부담을 덜기 위해 지금까지 선불로 발송하고 있다. (3년차부터는 택배 대신 1톤 화물차를 이용하고 있다.)


밀크로드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그즈음이다. 종이팩 재활용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직관적인 이름이었으면 했다. 멤버들과 함께 이름을 짓다가 실크로드 이야기가 나와서 자연스럽게 ‘밀크로드’라고 이름을 짓게 됐다. 종이팩을 모으며 하나둘 씩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종이팩 하나로 우리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던 이들에게 딱 맞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00개만 모아보자


대단한 걸 바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1년은 뭘 해도 재미있었다. 공간에 여유가 있으니 종이팩이 모이면 창고며 방에 쌓아 뒀다. 일손이 부족하면 친정엄마와 친구가 본인 일처럼 도와줬다. 대가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지구를 이롭게 하는 활동이니까, 나에게도 사회에도 지구에도 유익한 일이니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어줬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었고, 커피 한 잔 값을 아껴서 부림제지로 종이팩을 보내기만 하면 되니 힘들지 않았다. 초기 목표도 단순했다. 종이팩 1000ml 1,000개 모으기. 그런데 숫자를 세다 보니 6개월 차에 딱 1,000개가 모였다. 목표를 달성한 순간 멤버들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림제지에서 되살림휴지(종이팩으로 만든 휴지) 100롤을 보내준 것이다. 휴지를 받는데 마음이 벅차올랐다.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함께 종이팩을 모은 참여자들도 함께 기뻐했다. 신기한 건 그다음부터 매달 1,000개씩 종이팩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한계선은 있었다. 그 기준이 종이팩 1,000개였다. 적재한 종이팩이 1,000개를 넘어가면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해 볼만 한데?"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준비되어 있구나’ 하는 걸 거듭 느끼고 있다. 밀크로드 활동을 시작하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SNS에서 밀크로드 활동을 보고 집에서 모은 종이팩을 들고 온 사람도 있고, 지역 학교나 기업에서 밀크로드와 함께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기도 한다. 종이팩이라고 해서 다 받는 건 아니다. 헹구고, 펼치고, 말리지 않은 종이팩은 받지 않는다. 종이팩 분리배출 방법을 지키지 않아 절반 이상 되가져 간 사람도 있다.


이벤트성으로 일정 수량 이상 종이팩을 모아 오면 친환경 키트를 주는 행사를 한 적이 있다. 문제는 이런 행사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매번 같은 걸로 보상을 해줄 거라고 기대한다는 점이다. 보상은 없다. 부림제지에서 보내준 되살림휴지가 있다면 교환해 줄 수는 있지만 어떤 보상을 원해서 종이팩을 모아오신 거라면 차라리 행정복지센터에 가라고 말씀드린다. 우리는 공공기관이 아니니까. 시나 행정복지센터가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고, 잘하는 것을 엮어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곤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꼭 우리에게 보내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행정복지센터가 아닌 밀크로드에 종이팩을 보내는 이유는 자유롭고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팩을 모으는 건 쉽지만 수거 공간에 가져가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일례로 행정복지센터에 종이팩을 가져다주려면 운영시간에 맞춰 방문해야 한다. 하지만 밀크로드는 언제 어느 때고 가져다줄 수 있다. 종이팩을 가져다 놨다고 연락만 주면 된다. 또 서류를 작성하고 종이팩을 가져다주면 끝나는 행정복지센터와 달리 종이팩이라는 공통분모로 동질감을 느끼고 관계도 쌓을 수 있다는 것도 밀크로드의 장점이다.


우유팩은 사랑의 척도


밀크로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종이팩을 가져오는 사람도 모으는 사람도 종이팩이 잘 재활용되었으면 하는 마음 하나로 연결됐다. 누군가는 ‘돈이 안 되는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별 이유는 없다. 금전적 이득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신뢰로 단단히 엮인다는 생각 하나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공공기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밀크로드 캠페인을 진행한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초기 1년간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하나 둘 성과를 내고, 2019년에 ‘대한민국 균형발전 박람회 대국민 공모전 사회혁신가 in 순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순천시로부터 사회혁신협의체회의에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업을 진행하며 밀크로드 캠페인을 대표하는 로고를 개발하고, 유익한 파트너스와 개인 참여자들에게 전달할 간판과 뱃지를 만들었다. 여기서 유익한 파트너스란 밀크로드 캠페인에 동참하는 참여 가게를 뜻한다. 제일 많이 공들인 건 역시 간판이다. 가게에 계속 걸려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디자인했다. 간판은 캠페인 취지에 동감하고 6개월 이상 동참한 유익한 파트너스에게, 뱃지는 개인에게 전달했다.

가끔 공무원들이 유익한 상점에 찾아와 특별히 필요한 건 없는지 묻는다. 바라는 건 딱 하나다. 우유팩을 모아서 가져오는 것. 유익한 상점에 올 일이 있을 때 집이나 회사에서 모은 우유팩을 들고 오기만 하면 된다. 우유팩이 많던 적던 상관없다. 열심히 모아 가져오기만 하면 무엇을 요청하든 다 협조해줄 수 있다. 우유팩은 사랑의 척도니까.


돈은 안 되고 손도 많이 가지만 꾸준히 하면 그만큼 애정이 생기는 것 같다. 종이팩이 그런 존재다. 양보다는 꾸준히 잘 모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멤버들이랑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유한킴벌리도 30년 넘게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했는데, 우리도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해야 종이팩 분리배출이 일상이 되지 않을까?”

이 말을 하면 다들 웃는다. 농담 같지만 실은 농담이 아니다. 환경 캠페인 중 사람들의 기억에 뿌리내린 캠페인 슬로건은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30년은 해야 하지 않을까.


밀크로드 캠페인 3년차에는 상장을 만들었다. 이름하야 ‘잘모아상’.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잘 모은 우리를 위해 만든 상장이다. 신기한 건 상장을 받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벽면에 상장을 걸어두었다는 점이다. 너무도 소중하게 상장을 간직해주는 모습에 3년 후에는 시상식을 열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우리는 밀크로드 활동을 30년 동안 할 거니까 3년에 한 번씩 시상식을 열면 정말 즐거울 것 같다.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시작할 거라면 목표를 길게 잡는 게 좋다. 못해도 5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작게 시작하더라도 꾸준히, 오래 하는 게 중요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잘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간의 가장 큰 장점은 버틸 힘만 있다면 오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밀크로드의 목표는 사람들이 종이팩 분리배출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순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가서도 종이팩을 어떻게 배출해야 하는지 알면 좋겠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 이렇게 말한다.

"저희 30년동안 할 건데, 올해로 4년 차예요.

앞으로 26년 남았어요 (웃음)"

사람들이 밀크로드를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종이팩을 모아서 가져다주면 재활용 휴지를 만드는 곳에 가기 때문이다. 선별장을 거치지 않고 최종 종착지를 추적할 수 있어서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싶듯 분리배출한 재활용 자원들이 정말 재활용이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밀크로드는 앎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활동이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가볍고 재미있게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올해로 4년차를 맞은 밀크로드 캠페인은 향후 26년간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내일을 고민 중이다. 종이팩을 모으는 일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라 ‘힙하고 멋진 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